Olvi Kim
by Olvi Kim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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블로그에 일기는 가급적 안쓰려고 했는데, 그냥 넘어가기엔 오늘의 경험이 시사하는 바가 많아서 남겨본다.

퀘스트: 무사히 집으로 귀환하라

여전히 재택 근무 중이지만, 사정이 있어서 출근했다. 업무를 마치고 퇴근하려는데.

아뿔싸! 지갑을 안가져왔다!!!

…는 사실을 회사 밖에 나와서야 알게 됐다. 지갑이 없다는 것은 즉 수중에 현금도 없고 카드도 없다는 걸 뜻한다.

출근할 때에는 다른 이의 차를 얻어 탔고, 점심 시간에는 회사 식권으로 먹었고, 커피는 회사에서 그냥 주다보니 지갑을 안갖고 왔다는 걸 퇴근할 때까지 전혀 알지 못했다.

아놔 어쩌지... 하다가 문득 앱으로 ATM 출금이 가능하다는 게 떠올라서 지도 앱으로 ATM을 검색했다. 다행히 근방에 ATM 기기가 있다. 지척에 있는 이전 회사 건물에 S은행 ATM기가 있다… 하하하. 망설일 필요도 없이 그쪽으로 터벅터벅 간다. 현 회사의 지척에 있지만 오랜만에 보는 이전 회사를 보니 괜히 사진 한 장 찍고 싶어진다. 폰으로 빠르게 찍고 ATM 기기를 향해 간다.

앱 출금은 참 편리하다. 앱을 열고 이 계좌의 주인이 나라는 걸 인증하고 간편앱출금 이라는 메뉴를 통해 신청하면 1회용 인증번호가 뜬다. ATM 기기에서는 내 전화번호와 앱에서 받은 인증번호를 넣으면 출금이 된다. MMORPG 마냥 메시지 하나 출력해줘야 할 것 같다. 김올비 님이 3만원을 획득하였습니다! 그런데 말입니다.

우리 부모님 연배인 분들 중에 이 기능을 아는 분은 얼마나 될까? 아니 모바일 뱅킹을 쓰는 분은 얼마나 될까? 자녀가 앱을 설치해준 경우는 많지만 능숙하게 사용하는 비율은 얼마나 될까?

돈을 획득했으니 이제 아이템을 획득하러 가자. 지갑이 없다는 걸 인지하기 전까지의 나는 퇴근길에 역 앞에 있는 백화점에서 빵을 사갈 계획이었다. 내일 아침에 너무 너무 먹고 싶은 게 있었거든. 조금 전 아놔 어쩌지... 상황은 사실 집에 어떻게 가는가 하는 고민보다는 빵을 살 수는 있는 건가 라는 생각이 먼저였다. 나는 아이폰 사용자라서 S페이도 안되고 모바일페이들은 저 백화점에서 결제가 안된다고!!! (아니 되나? 솔직히 모르겠다.) 하지만 현찰이 있으니 이젠 걱정 없지! 하하하하하하하!!!

백화점에서 목표로 한 매장을 가서 원하는 빵을 고르고 결제를 하는 순간. 현금 1만원을 건네는데 내가 다 어색하다. 현금영수증 해달라는 소리도 백만 년 만에 해보는 것 같다. 잔돈 받을 땐 더 어색하다.

예전에는 이게 일상이었는데 말이다.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.

아무튼 메시지 하나 또 출력해보자. 김올비 님이 빵 두 개를 획득하였습니다!

이제 집으로 가자. 지하철 역으로 내려간다. 보증금을 내고 1회권을 살 수 있다는 건 전에 익히 듣긴 했는데 실전은 처음이다. 두근두근.

무인이 된지 오래인 지하철역. 일단 기계는 쉽게 발견했다. 솔직히 좀 쫄았다. 얼마 전 키오스크에서 햄버거 주문을 못해서 엄마가 울었다는 사연이 담긴 기사를 읽고 참 생각이 많았는데 다행히 이건 햄버거 키오스크보다는 쉽게 구성되어 있다. 그런데 말입니다.

환승에 대한 선택지가 많아 어르신들이 이 부분에서 헤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.

다 선택하고 나니 보증금 포함 2950원이라고 한다. 그런데 아까 빵 사고 남은 잔돈이 2천원 남짓이고 그 외는 1만원 권이다. 1만원 들어가긴 하나? 했는데 다행히 1만원 잘 잡숫고 거스름돈 7050원을 내게 하사하시었다. 이렇게 해서 김올비 님이 지하철 1회권을 획득하였습니다!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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…하고서 뒤를 돌아보니 자원봉사하는 할아버지께서 날 지켜보고 계셨다.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하시지 않았을까. 젊은 사람이 저기서 표를 사다니 별 일이네. 혹은 내가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닐까? (동공지진) 아흥흥 어느 쪽이건 머쓱한지고.

그 이후는 사실 별 거 없다. 1회권도 카드 형태인지라 삑! 소리 나게 찍고 다니면 된다. 환승할 때에도 마찬가지.
다만 도착지에서 보증금을 받아갈 것인가 혹은 이것도 기념인데 걍 내가 가질 것인가 고민하다가 지금 보증금 안받아가면 환급 안된다고 해서 걍 기계에 넣고 500원 받아왔다.

퀘스트를 끝낸 소감

오랜만에 현금으로 생활해보니 색다르고 신기한 경험이었다. 동전도 제법 생겼는데 이건 간만에 우리집 현관을 지키고 있는 저금통 님께 바쳤다. 이렇게 포식한 게 얼마만인가요 저금통 님?

지갑이 없더라도 핸드폰과 은행 앱이 있다면 그럭저럭 해결이 된다는 것은 깨달았다. 그런데 말입니다.

내가 노인이 되어서도 이러한 변화와 트렌드를 잘 쫓아갈 수 있을까 좀 두렵기도 하다.

내 경우 어려서부터 노년의 고단함을 많이 목격했고, 할머니와 같이 살면서 노화가 주는 무서움을 학창시절에 겪었고, 현재는 IT 변화에 적응하길 꺼리는 부모님이 계신다. (정작 자녀들은 다 IT 계열에서 일하는데 말이다.) 그런 배경이 있다보니 노인 문제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. 그래서 오늘 접한 순간 순간마다 내가 노인이라면? 이라는 생각이 자꾸 든 것이었다.

얼마 전 키오스크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, 노인 대상으로 IT 교육도 좀 잘 이뤄졌으면 좋겠고, 무엇보다 UX에 대한 표준화가 좀 이뤄지면 좋겠다. 남의 일이 아니다. 당장 나의, 우리의, 당신들의 미래가 될 날이 머지 않았다고.

위에 링크한 키오스크 기사의 말미를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.

무인 단말기와 같은 비대면 거래는 앞으로 더 많아질 겁니다. 소비자원은 이에 따른 고령자 지원이 필요하다며 방안을 내놨습니다.

  • 일단 사업자에게 무인 단말기 운영 개선을 유도하고 있습니다.
  • 직원 호출용 벨을 설치하고, 사용법을 구체적으로 게시할 것을 제안했습니다.
  • 관련 부처에는 ‘공공단말기 접근성 가이드라인’ 개정을 건의했습니다. 고령자용 화면 제공과 충분한 버튼 크기 등을 구체적 수치로 제시해달라는 내용입니다.
  • 또한 고령자를 대상으로 한 비대면 거래 관련 교육도 자체적으로 강화했습니다.

마지막으로 하나, ‘엄마와 키오스크’ 사연에 달린 한 댓글에도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.
“익숙하지 않은 개념과 언어를 몇 세대나 건너 배우는 데는 그만큼 다른 차원의 어려움이 존재한다.”

이해와 배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.